발기인 K의 혼잣말 VOL1 "롤렉스는 사지 않는다. 메르세데스는 타지 아디다스는 신지 않는다"
푸마는 못 가진 자의 상징. 아디다스는 가진 자의 상징.
골드 데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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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30
나는 푸마 매니아이다.
얼마나 푸마 매니아라고 하면 중학교 시절에 푸마 슈즈의 일본 총대리점이었다
리버먼 웰슐리가 주재하고 있던 「푸마 멤버스 클럽」에 입회해,
이후 오로지 푸마의 스파이크를 계속 사서 왔거나 푸마를 신지 않은 선수는
좋아할 수 없다는 병적인 경지에 이르렀을 정도의 매니아이다.
78년 월드컵에는 푸마에서 출전했다.
이탈리아의 남자전 MF 쟌카를로 안토니오니가, 디아드라로 안장 바꾼 한단,
관심을 잃어버린 자신을 깨달았을 때였다.
다만 푸마마니아의 감각에서 가자 디아드라는 결코 적이 아니었다.
라고 할까, 계약하는 선수의 경향이라고 할까 쯔보 같은 것은, 비교적 푸마에 가까운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인가 하면 좋아하는 메이커이기도 했다.
적은 어디까지나 아디다스.
그 왕도 듬뿍이라고 할까, 다른 사람을 압박하는 점유율과 구색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질투와 질투로 발견하고 있던 당시의 카네코타츠히토씨로부터 하면,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대체로, 아돌프(·더슬러. 알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아디다스의 창시자입니다.
만약을 위해)는 동생의 주제에, 형의 루돌프 (다스라. 푸마의 창시자입니다)보다
빅이 되어 버린 곳이 용서하고 싶었다.
우수한 동생과 여동생은 당시 나에게 있어서 컴플렉스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푸마는 가지지 않는 자의 상징. 아디다스는, 가지고 있는 자의 상징──.
지금부터 생각하면 편집적인 사고형태에 몰릴 수밖에 없지만, 당시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떠올랐다.
취직한 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속에서 굳게 맹세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안 되겠지만, 혹시 만일, 조금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해도.
롤렉스는 사지 않는다. 메르세데스에는 타지 않는다. 그래서 아디다스는 신지 않는다.
뭐, 3번째 이외는 거의 거의 아무 의미도 없는 맹세였다.
맹세가 실현될 가능성에 북메이커가 확률을 붙였다면,
확실히 15-16 시즌에 레스터가 우승한다는 확률보다 높은 것이 붙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프로 축구 리그는 없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출판사는 “연봉 1000만엔이 되기 위해서는 300세 정도 지금은 일하지 않으면”
라고 말할 정도로, 급료가 겸손한 회사였다.
다만 세상은 버블 한가운데서 취업하자마자 외차를 샀던 대학시대 동급생도 드물지 않았다.
요점은 맹세라는 체재를 취한 것만의 질투, 질투이다.
어쨌든, 메이저인 것, 왕도를 가는 것, 자신 만만이나 엘리트라든지 대인기라든지,
그런 종류의 모든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푸마는 사소했다.
나아가는 것은 왕도가 아니라 수도로, 삐카삐카의 엘리트보다는 그늘진 반역자의 냄새가 났다.
오벨라트가 아니라 네차. 마이어가 아닌 크레프.
그리고 벤켄 바우어가 아닌 크라이프.
대도시 뮌헨을 본거지로 독일에서 선수를 구입하던 바이에른은
아디다스의 상징으로 네덜란드 국경의 작은 도시에서 선수를 키우는 글래드바흐는 푸마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푸마를 신는 것은 나에게 헤비메탈을 듣는 것과 매우 비슷했다.
신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 약간의 반역자, 반골의 사람을 기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푸마를 신은 선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어쩌면 자신도‥‥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전혀, 몹시 괴롭다면 있을 수 없어.
지금은 아직 맹세가 살아 있고 롤렉스를 사지 않았다면
메르세데스의 소유자가 된 적도 없는 나이다.
물론 아디다스는 여전히 신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10대, 20대 무렵은 당연히 상당히 바뀌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푸마가 바뀌었다.
만약 카네코타츠히토라는 인간이 지금 현재 십대에 걸렸다고 해서
그래도 푸마 매니아가 될지 어떨지라는 가정을 해 보았다.
대답은 빨리 나왔다. (계속)
사진 : 시미즈 카즈요시
얼마나 푸마 매니아라고 하면 중학교 시절에 푸마 슈즈의 일본 총대리점이었다
리버먼 웰슐리가 주재하고 있던 「푸마 멤버스 클럽」에 입회해,
이후 오로지 푸마의 스파이크를 계속 사서 왔거나 푸마를 신지 않은 선수는
좋아할 수 없다는 병적인 경지에 이르렀을 정도의 매니아이다.
78년 월드컵에는 푸마에서 출전했다.
이탈리아의 남자전 MF 쟌카를로 안토니오니가, 디아드라로 안장 바꾼 한단,
관심을 잃어버린 자신을 깨달았을 때였다.
다만 푸마마니아의 감각에서 가자 디아드라는 결코 적이 아니었다.
라고 할까, 계약하는 선수의 경향이라고 할까 쯔보 같은 것은, 비교적 푸마에 가까운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인가 하면 좋아하는 메이커이기도 했다.
적은 어디까지나 아디다스.
그 왕도 듬뿍이라고 할까, 다른 사람을 압박하는 점유율과 구색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질투와 질투로 발견하고 있던 당시의 카네코타츠히토씨로부터 하면,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대체로, 아돌프(·더슬러. 알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아디다스의 창시자입니다.
만약을 위해)는 동생의 주제에, 형의 루돌프 (다스라. 푸마의 창시자입니다)보다
빅이 되어 버린 곳이 용서하고 싶었다.
우수한 동생과 여동생은 당시 나에게 있어서 컴플렉스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푸마는 가지지 않는 자의 상징. 아디다스는, 가지고 있는 자의 상징──.
지금부터 생각하면 편집적인 사고형태에 몰릴 수밖에 없지만, 당시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떠올랐다.
취직한 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속에서 굳게 맹세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안 되겠지만, 혹시 만일, 조금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해도.
롤렉스는 사지 않는다. 메르세데스에는 타지 않는다. 그래서 아디다스는 신지 않는다.
뭐, 3번째 이외는 거의 거의 아무 의미도 없는 맹세였다.
맹세가 실현될 가능성에 북메이커가 확률을 붙였다면,
확실히 15-16 시즌에 레스터가 우승한다는 확률보다 높은 것이 붙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프로 축구 리그는 없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출판사는 “연봉 1000만엔이 되기 위해서는 300세 정도 지금은 일하지 않으면”
라고 말할 정도로, 급료가 겸손한 회사였다.
다만 세상은 버블 한가운데서 취업하자마자 외차를 샀던 대학시대 동급생도 드물지 않았다.
요점은 맹세라는 체재를 취한 것만의 질투, 질투이다.
어쨌든, 메이저인 것, 왕도를 가는 것, 자신 만만이나 엘리트라든지 대인기라든지,
그런 종류의 모든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푸마는 사소했다.
나아가는 것은 왕도가 아니라 수도로, 삐카삐카의 엘리트보다는 그늘진 반역자의 냄새가 났다.
오벨라트가 아니라 네차. 마이어가 아닌 크레프.
그리고 벤켄 바우어가 아닌 크라이프.
대도시 뮌헨을 본거지로 독일에서 선수를 구입하던 바이에른은
아디다스의 상징으로 네덜란드 국경의 작은 도시에서 선수를 키우는 글래드바흐는 푸마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푸마를 신는 것은 나에게 헤비메탈을 듣는 것과 매우 비슷했다.
신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 약간의 반역자, 반골의 사람을 기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푸마를 신은 선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어쩌면 자신도‥‥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전혀, 몹시 괴롭다면 있을 수 없어.
지금은 아직 맹세가 살아 있고 롤렉스를 사지 않았다면
메르세데스의 소유자가 된 적도 없는 나이다.
물론 아디다스는 여전히 신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10대, 20대 무렵은 당연히 상당히 바뀌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푸마가 바뀌었다.
만약 카네코타츠히토라는 인간이 지금 현재 십대에 걸렸다고 해서
그래도 푸마 매니아가 될지 어떨지라는 가정을 해 보았다.
대답은 빨리 나왔다. (계속)
사진 : 시미즈 카즈요시